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고트 왕국 (문단 편집) ==== 토틸라의 활약 ==== 하지만 벨리사리우스가 페르시아 전선에 참여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비운 동안 동고트는 541년 [[토틸라]](Totila)를 새로운 왕으로 뽑은 후 다시 독립을 선언하고 동로마가 차지했던 이탈리아 반도를 유린했다. 토틸라는 그간의 패인이 로마군과 정직하게 교전을 치렀던 것에 기인했다고 보았다고 한다. 인력도 그렇지만 특히 자금력, 기술력에서 양국은 상당한 차이가 났고, 그나마 이 차이가 덜 작용하는 정면회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이 차이가 크게 작용하는 공성전, 해전으로 가면 답이 없었다. 그래서 토틸라는 철저하게 향촌을 장악하여 현지보급을 막고, 항구를 장악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 본국으로부터 지원을 최대한 방해하여 결국 이탈리아 관내의 로마군을 몇몇 도시에 가둬버리는 전략으로 방향을 잡았다.[*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Totila|Totila]] 중, 'Totila's strategy was to move fast and take control of the countryside, leaving the Byzantine forces in control of well-defended cities, and especially the ports.']벨리사리우스는 544년에 이탈리아 전선에 복귀했지만, 하필 이 시기에 동로마 제국에 심한 전염병([[흑사병]])으로 인한 기근이 들어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한 탓에 전황은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결국 548년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벨리사리우스를 다시 본국으로 불러들인다.[* 분명 기근도 원인이 되긴 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기본적으로 벨리사리우스의 군사적 능력을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에 항상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자칫하면 그가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1차 이탈리아 침공 때에도 벨리사리우스는 1만 명도 안 되는 병력으로 15만에 육박하는 동고트족 병력을 상대해야 했으며 2차 이탈리아 침공 때에는 그 절반 수준의 병력으로 버텨야 했다. 그런데도 이 정도의 전공을 올린 것을 보면 벨리사리우스가 얼마나 뛰어난 군인인지 알 수 있다.] 한편 이 시점에서는 이미 2-3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동로마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명의를 담아서 주화를 발행했었다고 한다. 아직 6세기의 게르만 왕국들은 로마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상황이라 주화, 직함 등을 완전히 독자적으로 사용하지 못한 채 제국의 권위를 일정 부분 빌렸는데[* 이 정도가 가장 약했던, 즉 반대로 독립성이 가장 강했던 것은 [[반달 왕국]]이었는데, 동서로마와의 전투에서 여러 번 이겼으며(특히 [[본 곶 해전]]에서 1천 척도 넘는 동서로마 합동 해군을 꺾었던 승리가 결정적이었다.) 또한 바다 건너 아프리카에 있어서 콘스탄티노플과 가장 물리적으로 멀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이탈리아 및 달마티아의 [[오도아케르]] 정권 및 동고트 왕국은 그 반대였는데, 구 서로마의 중심지라 현지의 구 서로마인들의 영향력이 다른 곳보다 더욱 강했고, 또한 게르만 국가들 중 가장 콘스탄티노플과 물리적으로 가까웠던 탓에 동로마 정부의 비위를 완전히 거스르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로마와의 결전이 임박했거나 혹은 이미 전쟁 중이었던 때 대하는 태도를 보면 차이가 확 드러난다. 반달의 겔리메르는 유스티니아누스로부터 폐위된 힐데릭을 복위시키거나 아니면 콘스탄티노플로 보내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둘 다 거절하며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보내는 서신에 '이것은 우리 내부의 문제다. 군주라면 누구나 자기 일에 신경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항변하여 당신이나 나나 같은 군주라는 독자의식을 드러냈으나, 동고트의 토틸라와 테이아는 전쟁 중인 상황에서도 동로마 황제를 주화에 꼬박꼬박 넣어서 발행했다.], 그런 상황에서 동로마군이 침략해 들어왔으니 차마 그 적군의 수괴(...)인 유스티니아누스의 명의로 주화를 발행할 수는 없고, 명목상으로 제국의 산하 종족 혹은 세력으로서 조약/동맹(foedus)을 제국과 최초로 맺었던, 즉 동고트 왕국이 세워지던 493년 당시의 황제인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명의로 주화를 발행했던 것이라고 한다.[* [[움베르토 에코]] 편저 중세 I의 60p에는 ''왕국들'은 곧 자국의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하지만 황제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 제국과 갈등을 빚을 때에도 왕의 이름을 동전에 넣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현재의 제국 통치자를 과거의 통치자로, 예를 들어 최초로 '포이두스'(foedus)를 맺었던 황제의 이름으로 대체했다. 동고트 왕국의 토틸라와 테이아가[* 모두 이 전쟁기의 왕들이다.] 아나스타시우스의 이름으로 대체한 솔리두스 금화가 바로 그러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